엄밀히 말하면 이건 반칙이다. 이야기를 따라 둘레길을 걷는 사람, 가족과 단풍산을 밟는 사람, 넉넉히 시간을 잡고 종주를 계획한 사람 모두를 단 30분 만에 추월했으니 말이다. 전북 남원에서 지리산 서북쪽 능선을 넘는 길은 도로가 깔려 있다. 지리산의 굴곡 있는 몸매를 빙빙 휘감은 길은 해발 1,172m 높이 ‘정령치’까지 게으른 방문객을 안내한다. 1988년 개통된 지방도 737호선을 타고 지리산 한 자락에 슬며시 발을 디딘다.
깊고 넓은 어머니의 품, ‘산의 나라’ 지리산
전북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를 오르는 길은 산 능선을 빙 둘러 나 있다. (이윤정기자)
지리산은 깊고 넓다. 어미가 아이를 낳듯 산이 봉우리를 낳고 계곡과 고개를 키웠다.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지리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라 부른다. 꽃봉오리 같은 산봉우리들과 꽃받침 같은 골짜기들이 백두산으로부터 연면히 흘러내려와 솟구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위에선 백두산이 아래에선 지리산이 각각 부모가 되어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을 받치는 형상. 그래서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이다.
80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지기에 지리산은 하나의 산이라기보다 산국(山國),즉 ‘산의 나라’로 통한다. 전남·북, 경남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면에 걸쳐 있으니 삼남 땅을 감싸는 큰 지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엔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현대엔 빨치산 전투가 벌어졌다. 영험한 산으로 추앙받아 천년 고찰도 많다.
여러 봉우리를 함께 밟는 지리산 종주 능선 산행은 등산객에게는 성지 순례와도 같다. 징검다리처럼 봉우리를 옮겨 다니는 등산로는 지리산밖에 없기 때문이다. 깊은 만큼 넓어 산행코스만 20여개에 달한다. 지리산 권역은 경남 진주·하동·함양의 동부권, 전남 구례의 서부권, 전북 남원의 북부권 등 3개 권역으로 나눠 구분한다.
둘러가는 길 vs. 횡단하는 길
걷는 길 vs. 달리는 길 정령치까지 도로를 따라 차를 운전하고 올라온 사람들을 위해서일까. 정령치휴게소는 지리산 바래봉까지 등산로가 연결돼있다. 본격적인 등산로로 들어가기 전에 가뿐히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펼쳐진다. 아래로는 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도로가 펼쳐지고 양 옆으로는 억새풀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정령치~바래봉 산행 코스는 약 5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등산을 하려면 채비를 따로 하는 것이 좋다. 바래봉까지는 아니어도 산책길을 따라 조금이라도 걷는다면 지리산을 밟는 즐거움을 짧게라도 맛볼 수 있다. (이윤정기자)
“오늘 이 길이 3일째 코스예요.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이렇게 지리산을 둘러 걷고 있죠.” 5~6명의 지리산 둘레길 순례객이 황금들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리산 정령치에 가기 위해 남원 운봉읍을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것. 정령치 가는 길을 묻자 지리산 지도까지 펼쳐 보이며 조리 있게 설명해준다. 알려준 길 그대로 차를 몰고 나서며 걷는 이들이 문득 부러워진다. 가파른 급경사 구간 덕분에 천천히 운전해야 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은은하게 불이 붙은 지리산 능선을 조금 더 마음에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부터 정령치를 잇는 지방도 737호선은 1988년 완공됐다.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부터 전남 구례군 천은사 구간의 지방도 861호와 남원시 주천면 육모정에서 고기리를 잇는 지방도 60호 등 지리산 횡단도로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개통됐다. 남원시, 구례군, 함양군, 산청군 등 인접 시군은 관광개발을 위해 각 지방도로를 연결했다. 많은 시간이 걸리던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지리산 코스는 반나절, 하루, 1박 2일 코스 등으로 다양해졌고 평범한 사람도 지리산 종주를 꿈꾸게 됐다. 그리고 지리산 횡단도로는 연간 110만명이 찾는 인기도로가 됐다.
정령치와 지리산, 변화와 보존의 갈림길
단풍 속 드라이브 지리산 단풍이 절정으로 내려오기 바로 직전 정령치를 찾았다. 아직은 푸르른 빛깔이 남아있는 나무들 속에 빨갛게 얼굴을 붉힌 단풍나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운전자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가지를 길 쪽으로 쑥 뻗은 모양이다. 그 생김새가 근사해 단풍 옆에 서서 셔터를 눌렀다. 마침 구불구불 급경사 코스를 내려오던 차량이 단풍과 함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윤정기자)
지리산 횡단도로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정령치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중간에 해발 1,172m 높이로 솟아있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을 이곳에 두었다하여 ‘정령치(鄭嶺峙)’라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지리산의 명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정령치 정상 구간에는 휴게소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바래봉까지 약 5시간 코스의 등산로가 연결된다. 간혹 등산복 차림의 사람이 눈에 띄지만 더 자주 이곳을 들르는 건 대형 관광버스다. 지리산 횡단도로를 타고 정령치 정상에 들러 숨 고르기를 하고 내려간다. 땀은 흘리지 않고 지리산의 절경은 담아가니 편리하긴 한데 왠지 말끔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연간 80만대의 차량이 횡단도로를 지나가니 대기오염은 물론 야생동물 로드킬(동물이 도로에 나왔다가 자동차 등에 치여 사망하는 것)이 심각하다는 주장도 여기저기서 제기된다.
최근 지리산은 케이블 설치와 지리산댐 설치로 찬반논란이 뜨겁다. 구례군이 지리산 온천에서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까지 4.5km구간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고 나서자 환경단체에서 지리산 훼손을 우려해 반대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지리산댐은 경남지역 식수원 보충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댐 예정지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휴천면 일대는 칠선계곡, 백무동, 뱀사골의 물이 합쳐지는 생태계의 보고이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빨리 오르는 지리산은 편리한 만큼 깊이 담아가지 못한다. 횡단한 지리산을 다시 둘러가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듯 말이다. 편리와 이익을 목적으로 지리산을 바꾼다면 깊고 넓은 지리산이 언젠가는 얕고 좁아질지도 모르겠다.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남원 IC에서 나와 구례방면 국도19호선에 오른다. 함양방면 지방도 60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정령치에 다다르는 지방도 737호선을 만날 수 있다. 정령치휴게소에서 팔랑치 및 바래봉까지 등산로가 연결되기 때문에 산행을 계획해도 좋다.
지리산 국립공원 http://jiri.knps.or.kr/
지리산 횡단도로인 지방도 737호선은 급경사가 이어지는 운전 난코스다. (이윤정기자)
가을 억새 처음 사진을 찍을 때 염두에 둔 주인공은 지방도 737호선 도로였다. 그래서 억새의 포커스는 날리고 도로와 달리는 차에 렌즈의 초점을 맞췄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꾸만 억새에게 눈이 간다. 아무래도 지리산의 주인공은 자연인가보다. 하는 수 없이 억새에게 주연의 자리를 내주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몸을 살랑이며 고마움을 표현한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도로가 주인공인 사진보다 훨씬 예쁘다. (이윤정기자)
자연에게 생명을 내어주고지리산 횡단도로를 달리다보면 만나는 가을 풍경이다. 몸 좀 편해보겠다고 자동차를 타고 온 방문객에게도 눈 호강을 시켜주니 다음번에는 지리산을 더욱 깊이 느끼고 싶어진다. 지리산 단풍은 은은하게 불이 붙은 것처럼 우아한 빛깔이다. 마치 자녀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부모처럼 산은 자연에게 생명을 아낌없이 쏟아주고 스러져가는 불빛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윤정기자)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 정령치휴게소 해발 1,172m 높이 정령치 정상에 휴게소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등산로가 연결되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지리산의 절경을 감상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휴게소에서 내려다보면 지리산의 명봉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시계가 좋은 날에는 서북쪽으로 남원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사람들은 30분도 채 안 돼 대부분 떠나간다. 그래도 지리산 한 자락에 서 본 셈이니 맛보기를 했다고는 할 수 있다. (이윤정기자)
가을을 입은 길 셔터를 누를 때는 사진이 이렇게 가을빛을 입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집에 와서 사진을 받아보니 온통 누런색이 화면을 장악한다. 비단 2달 전만해도 산은 푸르름을 주체하지 못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감쪽같이 모습을 바꿔 다른 매력을 발산하다니. 자연의 변신술은 매번 경이롭다. 정령치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입구는 파란 가을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여 더욱 계절을 실감하게 한다. (이윤정기자)
지리산을 내려다보다 지리산 종주는 등산객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봉우리 하나만을 오르는 다른 산과는 달리 지리산은 징검다리처럼 연결되는 봉우리와 봉우리를 옮겨 다니며 종주가 가능하다. 정령치 휴게소에서 지리산을 굽어봤다. 지리산은 깊고 넓은 어머니산이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굽어본 지리산의 감동도 이러한데 직접 봉우리를 넘어 내려다보는 지리산의 감동은 아마 몇백배는 되지 않을까. (이윤정기자)
떠나는 버스, 배웅하는 가을산 정령치휴게소에서 10여분을 머문 버스가 금세 산을 내려간다. 지리산을 잠깐 느끼는 게 서운한지 산은 얼굴을 붉히며 배웅한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생동감 있다. 여름산과 달리 가을산에서는 완숙미가 느껴진다. 그래서 떠날 때는 더욱 아쉽고 떠난 뒤에는 더욱 그립다. (이윤정기자)
산의 나라, 지리산 지리산의 봉우리를 이어놓으면 동물의 등뼈처럼 휘어져있다고 한다. 얼핏 내려다보니 크고 작은 봉우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80개의 봉우리가 솟았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니 지리산은 하나의 산이라기보다 산국(山國),즉 ‘산의 나라’로 통한다. 전남·북, 경남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면에 걸쳐 있으니 삼남 땅을 감싸는 큰 지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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