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올라 하루 잔 뒤 천왕봉에 올랐다가 다시 중산리로 내려오는 천왕봉 원점회귀 산행로에는 지리산의 핵심만을 슬쩍 빼내어 맛보는 듯한 쾌감이 있다. 지리산의 그 육중한 덩치로 보아 능선까지 오르는 수고로움이 뜻밖으로 적고, 3대에 걸친 덕을 강조할 만큼 뛰어나다는 천왕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법계사 길의 발걸음 또한 유유자적이다. 그러므로 해가 짧은 한겨울이고 서울 사람이라도 1박2일이면 섬진강 노을 탐승까지 곁들이는 여정이 가능하다.
물론 도로 조건이 중산리의 탐방지원센터 앞 주차장까지 차로 단숨에 오를 수 있는 상태일 때에 한해서다. 폭설이 내리면 산릉 위의 설경은 좋아지되 산행 기점까지 다가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결 늘어난다는 역설 아닌 역설을 감수하고 길을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1월 6, 7일로 택일해 이 중산리~천왕봉 길 탐승에 나선 취재팀은 이를테면 그 역설의 틈새로 두 가지 이(利)를 동시에 취하는 행운을 누렸다. 연초의 폭설 이후 중산리 탐방지원센터까지 제설작업이 다 끝난 상태였고, 장터목대피소 지붕을 잡아 흔들며 밤새 잠을 설치게 하던 안개바람은 실은 다음 날 몰아의 기쁨으로 이끄는 상고대 풍광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중의 흰 산호천국 같은 설화터널 속을 지나고 또 지나 천왕봉까지 오르는 데는 그러므로 40분이 아니라 네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 ▲ 1월 7일의 장터목~천왕봉 능선. 따로 어디랄 것도 없이 뛰어난 설경으로 연이어진 축복의 길이었다.
산사태 흔적도 눈으로 뒤덮인 겨울 유암폭포계곡
탐방지원센터 안으로 들어 찻길을 따라 100여m 오르면 왼쪽으로 커다란 네온 안내판 옆으로 천왕봉과 장터목 오름길목이 나온다. 이 길로 접어들면 이내 지리산다운 깊은 분위기의 산길로 바뀐다. 바윗덩이들 위로 둥글둥글 부드러운 굴곡을 이룬 두툼한 눈밭에 쏟아지는 햇살, 눈 위로 고개를 내민 산죽의 짙푸른 이파리들로 산록의 분위기는 투명하고 밝다. 햇살은 밝아도 계곡의 서늘한 냉기마저 거두어 재킷 틈새로 파고드는 혹한풍이 매섭다.
중산리~장터목~천왕봉~중산리의 역세모꼴 길을 1박2일로 돌아오는 데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지점은 칼바위에 이어 출렁다리를 지나자마자 왼쪽 유암폭포 계곡길 초입이다. 마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샛길 같은 인상이어서 그냥 무심히 지나치게 되기 쉽다. 일단 이렇게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을 허비하면 장터목대피소에 저물어서야 오르게 될지 모른다.
유암폭포계곡은 몇 해 전 폭우로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올해 유달리 풍성한 눈으로 상채기들이 모두 가려져 1월의 유암폭포골은 신선한 처녀 계곡인 양 깨끗하고 아름답다. 이 계곡의 눈만큼은 연중 녹지 않고 이렇듯 백색 세계로 남았으면 싶다.
- ▲ (좌) 북새풍과 눈이 평범했던 모든 나뭇가지들을 찬란한 보석 산호로 탈바꿈시켰다. (우) 눈부신 설화의 숲을 지나는 취재팀.
입산통제 해제 직후인 어제 천왕봉~장터목 길을 지나 하산 중이던 주청장씨 부녀 일행을 만났다. “아무도 지나지 않아 허벅지까지 빠지면서 천왕봉을 올랐는데, 힘들었지만 원상 그대로의 지리산을 맛본 것 같아 너무 좋다”며 새삼 흥분한다. 과연 길 바깥으로 나서보니 눈이 간단히 무릎을 넘는다. 눈 내린 직후 이 길을 지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폭설이 내린 뒤에는 공단 직원들이 일부러 위에서부터 아래로 길을 내기 위해 내려오기도 한다.
사태가 휩쓸며 개활지처럼 넓어진 계곡을 우측으로 건너자 곧 넓적하게 얼어붙은 유암폭포가 길 아래로 내려다뵌다. 사태로 하단부 주변이 매몰되며 폭포는 볼품없이 짧아졌다. 폭포 이후로 길은 가팔라졌고, 장터목 전에는 아이젠을 차지 않은 이는 발이 죽죽 미끄러질 만큼 급경사로 변한다.
장터목에 오르자마자 숨결이 턱 막힌 것은 바람이 세차서만이 아니다. 바람에 진한 지린내가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독한 지린내와 밤새 바람에 화장실 쪽 지붕이 덜컹거리는 소리는 이른 아침의 천왕봉 풍광을 보려면 도리없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다.
아침 5시경 요의를 참지 못하고 남보다 먼저 화장실에 다녀온 누군가가 “어휴, 안개바람이 대단해. 일출이고 뭐고 글렀어. 잠이나 좀 더 자자고”하며 바깥 일기를 전한다. 천왕일출은 포기하고, 그후 1시간 간격으로 8시까지 날씨를 체크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배낭을 꾸려 대피소 밖으로 나서자 그대들 나서기를 참고 기다렸다는 듯 푸른 하늘이 언뜻 비친다. 설화를 보석으로 드러내는 환희의 푸른 하늘, 감동의 푸른빛이다.
- ▲ 1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 사슴뿔 상고대. 2 서늘하고 맑은 기운으로 가득한 눈꽃 숲터널 아래. 3 상고대·설화로 성장한 구상나무.
모든 수목의 모든 가지를 찬란한 보석으로 치장한 듯
- ▲ 지리 주릉의 모든 나무들이 설화의 축복을 받았다. 취재팀이 눈부신 눈길을 걷고 있다.
- 상고대로 치장한 겨울 나무들은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를 따지지 않는다면 사계를 통틀어 이곳의 나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색과 자태가 아닐는지. 대피소부터 그 위 천제단에 이르기까지의 숲지대에서만 30여 분. 제석단 고사목지대에서 또 1시간이다.
상고대 무늬 속에는 바람의 비밀이 숨어 있다. 눈이 내리는 대로 소복이 쌓이는 설화와 달리 상고대는 바람이 불며 나뭇가지에 눈가루가 들러붙은 것이라 무늬가 한결 다양하다. 이 상고대와 설화가 고루 섞여 만발했다. 고사목지대 중간 전망대에 올라선 일행은 감청색으로 겹겹을 이룬 먼 산릉들과 어울린 상고대 풍광 속에 또 10여 분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 간혹 길게 눈처마가 지기도 한 설릉과 저마다 상고대로 멋을 한껏 낸 수림지대에서 또 1시간 등으로 천왕봉 등행길은 느리게 느리게 이어졌다.
통천문 바위굴을 빠져 오른 뒤에도 다시 반야봉 쪽을 일별했으나 지리산 북서쪽 일대를 뒤덮은 운해는 반야의 그 볼록한 두 쪽 뺨을 끝내 감추고 있다. 다른 계절 지리산 주릉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었던 반야봉은 이내 잊혀지고 다시 뭉클뭉클 나뭇가지들에서 부풀어오른 듯 소담스레 상고대 덩이들로 장식된 숲터널로 눈길이 간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냉기가 옷속까지 스며드는 북서풍이 매서운, 나무 한 그루 없는 정상 능선이다. 이 추운 바람 속에서도 저 위 천왕봉 정상은 여러 등산객들의 실루엣으로 복잡하다. 바람이 세어서 눈이 쌓일 겨를 없이 날리고 검은 바위지대라 곧잘 녹는 탓인지 정상부엔 눈이 거의 없다. 정상 표지석에 서자 남쪽으로 한낮의 감청색 산릉들이 맑은 겨울 햇살 아래 겹겹이 기대어 서서 졸고 있다. 바람만 없다면 이곳 정상부도 나른한 기운이 감돌 것 같다. 로터리대피소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은 줄곧 등 뒤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오르막길을 오른 탓인지 티셔츠 차림인데도 구슬땀이 맺혔다.
- ▲ (좌) 천왕봉이 설화의 숲 저편에 솟았다. (우) 북서풍이 며칠 몰아붙여 일으킨 커니스를 밟으며 즐거워하는 산꾼.